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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으로 본 한국 온라인 게임 10년사-①바람의 나라

◆한국 온라인 게임의 효시(曉示) '바람의 나라'

'바람의 나라'는 90년대 초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등 PC 통신에서 유명했던 머드 게임의 인기를 등에 업고 온라인에서 서비스된 발전된 머드 게임이었다. 1995년 첫 서비스와 함께 전국을 강타했고 PC를 가지고 있던 10~20대를 모니터 앞에서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바람의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선 바람의 나라 이전 세대의 게임인 머드(MUD) 게임을 이해해야만 한다. 머드란 용어는 'Multiple User Dimension'이란 말풀이처럼 수십에서 수천 명이 한꺼번에 즐기는 다중 사용자를 뜻한다. 현재 서비스되고 있는 온라인 게임에 익숙한 세대들은 이해할 수 없는 그래픽이 전혀 없는 텍스트로만 이뤄진 게임을 일컫는다.

전화선을 통해 파일을 주고 받았던 당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학생들은 이 머드 게임에 빠지고 말았다. 대학 입시를 망치는 10대는 기본이고 다른 사람들과의 채팅을 끊지 못해 출근을 못하는 직장인들도 다반사였다. MMORPG에 중독된 일부 게이머들의 이야기를 10수 년 전에 이미 볼 수 있었다. 분당 이용료 20~30원 하는 채팅 게임에 사람들이 일희일비하던 시절이다.

바람의 나라는 이처럼 각 PC통신에서 인기를 끌고 있던 머드 게임을 즐기던 대학생들의 아이디어가 모여 개발됐다.

◆카이스트 인맥
바람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선 한국 최고의 두뇌들이 모인다는 카이스트(KAIST)를 알아야 한다. 카이스트는 '단군의 땅'이라는 머드 게임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마리텔레콤의 장영주 사장을 비롯해 김정주 현 넥슨 홀딩스 대표, 송재경 XL게임즈 대표 등 게임계 거물 인사들을 배출한 학교다. 게다가 1992년 한국 최초로 학내 전산망을 구축해 컴퓨터 광들에게는 최적의 게임 환경을 완성했다.

바람의 나라는 앞서 언급한 김정주와 송재경 두 천재가 만나 개발한 걸작. 온라인 게임을 뒤늦게 시작한 게이머들이라면 송재경 대표를 '리니지의 아버지' 정도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송재경이 스타 개발자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바람의 나라가 서비스되면서다.

송재경 사장은 바람의 나라를 개발하며 프로그래밍뿐 아니라 기획, 그래픽, 음악 등 게임에 필요한 전 부문에 걸쳐 손을 댔다. 게임이 시장에 공개된 뒤 송재경은 일약 게임 개발에 스타가 됐고 이후 '리니지' 제작에 참여해 대박 신화를 만들어냈다.

이후로도 카이스트 인맥은 현재까지 온라인 게임 개발 최일선에서 맹활약하며 주옥 같은 게임들을 만들고 있다.

◆대박을 위한 '시련기'
바람의 나라가 1995년 시장에 첫 선을 보였을 때엔 성공을 예상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원작 만화 '바람의 나라'(김진作)의 스토리를 충분히 살리지 못해 배경과 그래픽만 고구려 색채를 입힌 채팅 게임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는 머드 게임에 익숙한 게이머들이 바람의 나라를 완전히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채팅으로 모든 게임을 진행했던 머드 게임의 발전으로만 여긴 게이머들이 캐릭터를 만들고 마을에 모인 후 채팅 이외에 다른 일들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작정 사냥에 나섰다 죽기라도 하면 유령이 돼 방황하다가 게임을 종료하곤 했다.

이 시절 게임관련 커뮤니티에는 바람의 나라를 칭찬하거나 비난을 하는 게시물이 가득했다. 칭찬하는 글 대부분은 새로운 시도로 게임산업이 진일보하게 됐다는 것이었고, 비난의 글은 대부분 게임 진행이 어려워 난이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 시절 바람의 나라는 사용자가 많기도 했지만 접속했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사용자들도 많았다. 때문에 회사를 경영할만한 매출을 낼 수 없었다. 넥슨은 회사를 유지하기 위해 대기업의 웹사이트를 개발하거나 시스템 통합 작업을 대행하기도 했다. 바람의 나라가 안정적으로 서비스된 1998년까지 시련기는 지속됐다. 웹 에이전시 사업이 실패했다면 현재의 넥슨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지 모른다.

◆PC방 열풍과 함께 '순풍'
바람의 나라가 대박의 길에 접어든 시점은 1998년 PC방이 전국을 강타한 시점과 같이 한다. 1998년 4월16일 '스타크래프트'가 배틀넷이라는 신개념 서비스로 청소년과 대학생을 PC방으로 이끌었고 바람의 나라 역시 정식 서비스 2년째에 접어들며 매출이 급격히 늘었다.

바람의 나라가 PC방에서 인기를 끈 이유는 스타크래프트와 전혀 다른 게임성 때문이었다. 스타크래프트는 배틀넷에 접속해 서로 대전을 벌인 뒤 헤어지는 것으로 끝나지만 바람의 나라는 사냥과 거래 외에도 커뮤니티의 재미가 있었던 것.

스타크래프트로 게임을 접한 신입 게이머들이 게임의 다양한 재미를 추구하며 바람의 나라를 접하고선 커뮤니티의 매력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이 때 바람의 나라에 중독된 학생과 회사원들이 발생했고 온라인 게임 중독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후 리니지가 등장하며 바람의 나라의 인기가 한 차례 더 위기를 맞았지만 아기자기한 캐릭터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 등으로 이후 '퀴즈퀴즈', '크레이지 아케이드' 등으로 이어지는 '넥슨 게임'의 역사를 구축했다.

◆2005년 무료화 이후 부활
바람의 나라가 리니지, 뮤 등 다른 온라인 게임이 속속 등장하면서 게이머들에게 한동안 잊혀진 게임으로 남았었다. 1900만 명을 훌쩍 뛰어 넘는 회원 가입자와 10년이라는 서비스 시간만이 바람의 나라의 자랑거리였다.

2005년 바람의 나라가 서비스를 시작한지 10년을 맞이하며 변하기 시작했다. 넥슨이 바람의 나라를 비롯해 '테일즈위버', '아스가르드', '어둠의 전설', '일랜시아' 등 5개의 게임에 대해 모든 과금정책을 철폐하고 무료화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바람의 나라는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넥슨 발표에 따르면 무료 발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동시 접속자 수가 13만 명을 기록하며 부활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 침체와 반짝 성수기를 오가다 최근 동명의 드라마 방영에 힘 입어 접속자 수가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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