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슬픈 얼굴 앞에서 엘리시안은 더 이상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아아! 제국의 황제가 권력에 눈이 멀었구나! 인간이 스스로 오리하르콘을 만들어 내다니! 세상에 있는 저 감응기들을 어떻게 감당 하려고!”
평생 감응기를 파괴하며 살아 왔다는 마르티오가 분노에 몸을 떨었다.
아틀라스와 마르티오 그리고 엘리시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손 바닥 만한 공터에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틀라스와 엘리시안은 다음날 밥 일림을 떠났다.
아틀라스가 동행을 권유했지만 마르티오는 정중하게 사양했다.
자신은 더 이상 모험을 떠날 나이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건 핑계에 불과하다.
사실 마르티오는 밥 일림의 입구를 아직 찾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니 마력탑을 부수고 싶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력탑이 바위계곡 안에 틀어 박혀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마르티오 사이러스는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고귀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남기로 한 것이다.

“우리가 스피어 산맥을 넘으면 전쟁도 끝나 있겠죠?”
아틀라스의 말에 엘리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마르티오를 만난 뒤로 엘리시안은 더 이상 제국의 귀족티를 내지 않았다. 아틀라스의 어머니가 마물이 되어 처형당했다는 것을 알고 난 뒤로 제국의 귀족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도 사라졌다. 지금은 그저 이 얼빠진 전쟁에 동원된 현실이 싫을 뿐이었다.
왠지 힘 빠진 음성에 아틀라스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엘리시안을 바라보았다. 밥 일림에서부터 엘리시안은 기운이 없어 보였다.
“혹시 마력탑과의 공명 이후로 몸이 안 좋아 진건 아니에요?”
“아니요. 몸은 전보다 더 가볍고 개운해요. 동상도 다 나은 걸요”
“다행이네요”
아틀라스는 이해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제 되지 않은 조각을 몸에 지닌 자신도 이렇게 날아 갈 것 같다. 순수한 오리하르콘을 가진 엘리시안은 자신보다 더 좋을 것이었다.
“내가 걱정 되요?”
엘리시안이 짓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아틀라스가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답했다.
“갈 길이 먼데 또 쓰러지면 내가 고생을 해야 하잖아요”
“아, 그랬구나”
엘리시안은 마치 여행 중인 사람처럼 주변 경치를 살폈다.
“저기 봐요. 죽음의 회랑이라고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풍경이 아름답지 않아요? 난 제국의 여러 곳을 다녔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곳은 처음이에요”
“그건 그렇네요. 춥지만 않으면 정말 멋진 곳일 거에요”
“치이! 남자가 좀 대범해 봐요. 춥다고 움츠러들지 말고”
“춥다고 움츠러든 이 남자가 엘리시안님을 업고 산을 몇 개나 넘었다는 걸 기억해 주세요”
“네네, 알겠습니다”
처음과 달리 두 사람은 상대가 적(敵)이라는 개념을 버린 지 오래다. 지금은 동행중인 모험가들처럼 서로를 챙겼다.
밥 일림에서 나온 뒤로 두 사람은 눈 덮인 산을 수도 없이 넘었다.
아틀라스는 무모하리마치 단순하게 동쪽으로 전진했다.
길이 있든 없든 동쪽으로만 갔다.
처음에는 붙어서 자야 하는 잠자리가 낯설었지만, 이제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상대를 부둥켜안고 잤다엘리시안과 아틀라스가 서로의 몸을 알게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