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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머] 잊어선 안될 게임 업계 대사건 '아타리 쇼크'

수많은 게임들이 플레이되는 과정에서 여러 일들이 벌어집니다. 게임 내 시스템, 오류 혹은 이용자들이 원인으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은 게임 내외를 막론한 지대한 관심을 끌기도 합니다.

데일리게임은 당시엔 유명했으나 시간에 묻혀 점차 사라져가는 에피소드들을 되돌아보는 '게임, 이런 것도 있다 뭐', 줄여서 '게.이.머'라는 코너를 마련해 지난 이야기들을 돌아보려 합니다.<편집자주>

'게.이.머'의 열 한 번째 시간에 다룰 사건은 바로 게임 업계의 대사건 '아타리 쇼크'입니다. 1980년대 전 세계 게임시장을 그야말로 황폐화 시킨 게임 'E.T.'와 그로 인해 발생한 '아타리 쇼크'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한창 게임 산업 붐이 일던 당시 게임을 출시하기만 하면 돈을 번다는 생각에 빠져 저품질 버그 투성이 게임들이 쏟아져 나오다 못해 큰 기대를 받던 게임 'E.T' 마저 실망만을 안겨준 것인데요. 크게 실망한 이용자들이 게임 구매를 전혀 하지 않아 시장 자체가 거의 소멸되다 시피하게 됐습니다.

개발사와 이용자 간의 신뢰가 사라지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그리고 아직도 후유증이 남아있는 이 끔찍한 암흑기가 오기까지에 대해 전해드리겠습니다.

[게.이.머] 잊어선 안될 게임 업계 대사건 '아타리 쇼크'

◆때는 1980년대, 가정용 게임기의 황금기

1972년 '퐁'이 아케이드 게임으로 큰 성공을 거둔 이후 '브레이크아웃', '스페이스인베이더' 등의 당시 혁신적인 게임이 출시되며 전자 오락 사업의 시장 자체가 엄청나게 확대됩니다.

그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것은 '퐁'과 '브레이크아웃'의 개발사 '아타리'였습니다. 몇 번의 성공으로 게임 시장의 가능성을 높게 본 아타리는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 '아타리VCS'(후에 아타리 2600으로 개칭)을 개발해냅니다. 오락실에서만 즐길 수 있던 게임을 집에서도 즐길 수 있게 한 것이죠.

초기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아타리를 인수한 워너 커뮤니케이션(지금의 타임워너)에서 대대적인 마케팅을 시작하면서부터 점차 판매고를 늘려갔습니다. 그러다 1980년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아타리 VCS용으로 발매되며 기록적인 판매고를 연일 갱신했습니다.

[게.이.머] 잊어선 안될 게임 업계 대사건 '아타리 쇼크'

이에 힘입은 아타리VCS는 1980년 한 해 동안 200만대 넘게 팔렸습니다. 이후 누적 판매량이 2600만 대에 이르렀고 인기 게임 소프트의 경우 백만 단위의 판매고를 기록했죠. 모두들 휘둥 그래진 눈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존재하지도 않던 게임 시장이 이제 북미에서 가장 핫한 시장이 된 셈이니 말입니다.

'아타리VCS' 발매 이후 세계 게임시장은 그야말로 황금기였습니다. 나오는 게임마다 기본적으로 수십만장이 팔릴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게임 카트리지에 이름만 적어도 팔린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오죽하면 애완동물 식품을 만드는 회사도 애완견 용품 광고를 본뜬 게임을 만들어 출시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죠.

1977년 7500만 달러에 불과했던 아타리 매출액은 3년 만에 22억 달러로 스무배 이상 확대됐습니다. 아타리는 미국 역사상 가장 빠르게 성장한 기업으로 부러움을 샀습니다. 아타리는 공격적인 마케팅 행보를 보이며 사업을 크게 확장했죠. 하지만 정작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개발자들에 대한 처우 미비, 게임에 대한 낮은 이해도로 인한 소통 부재 등이 원인으로 졸작 게임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시작된 침몰, 징조를 무시한 사람들

쏟아지는 졸작 게임들은 끝이 없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우후죽순처럼 늘어만가는 개발 업체들은 소재를 가리지 않고 비디오게임으로 포장 작업만 해 출시했죠. 저질 포르노 게임들까지도 무분별하게 쏟아졌습니다. 아타리도 크게 다를 바는 없었습니다. 3달러짜리 루빅큐브를 40달러 짜리 비디오 게임으로 내놓았죠. 아타리 내외부에서 이 게임의 출시를 반대했지만 아타리는 무시했습니다.

아타리에 이식된 '팩맨'
아타리에 이식된 '팩맨'

이용자들의 실망도 점차 커져갔습니다. 아타리는 당대 최고 인기를 누리던 아케이드 게임 '팩맨'을 '아타리2600'용으로 직접 컨버전해 출시했습니다. 그런데 이 게임은 오락실의 원작과 같은 게임이라고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게임 진행 속도도 엄청나게 느렸고, 캐릭터들이 사라지는 버그는 물론 산재한 버그들에 이용자들은 분통을 터트렸죠.

그렇지만 이 게임은 원작의 유명세 덕에 700만장이나 팔렸습니다. 하짐나 아타리는 이미 1200만장을 생산한 상태였습니다. 이는 아타리VCS 기기의 판매량보다도 많은 수치였는데도 말입니다. 아타리는 결국 500만장에 달하는 재고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죠.

물론 이후 형편없는 게임에 실망한 구입자들이 몰려 환불을 요구해 더 많은 재고가 쌓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타리는 이용자들의 불만을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다시 다른 게임들을 찍어냈습니다. 이용자들의 실망이 쌓여만 가는 것은 무시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타리 쇼크의 시발점인 게임 'E.T'가 등장합니다.

◆외계인 친구와 함께 지구를 떠난 아타리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겨준 명화 'E.T' 하지만 게임에서는 분노만을 안겨줬다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겨준 명화 'E.T' 하지만 게임에서는 분노만을 안겨줬다

1980년대 초, 스티븐 스필버그의 SF 영화 'E.T'가 개봉했고 영화 사상 유래없는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이를 지켜본 아타리는 'E.T'라면 절대로 실패하지 않겠다고 판단해 2500만 달러라는 거액을 주고 'E.T'의 라이센스를 구매해 게임화를 계획했죠.

아타리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E.T' 게임을 발매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문제는 크리스마스가 단 5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과 판권 계약에 너무 많은 돈을 쓴 나머지 개발비가 부족했던 것 입니다. 개발을 늦추거나 포기했어도 될 상황이지만 아타리는 크리스마스 대목을 놓칠 수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개발은 강행됐고 그들은 정말 5주 만에 게임을 만들어냈습니다. 물론 졸작으로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성공할 것이라 생각한 아타리 수뇌부는 초판 물량으로 500만장을 생산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런 지시에 사내에서 조차 반발이 심했죠. 'E.T' 개발팀에 소속되는 것조차 꺼려졌습니다.

결국 아타리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E.T'를 출시하고 모든 매체를 동원해 광고를 쏟아 부었습니다. 하지만 이용자들이 접한 'E.T'는 충격 그 자체였죠. 느린 게임진행과 조악한 그래픽은 둘 째 치더라도 대체 뭘 하라는 건지 알 수 없는 게임성은 이용자들에게 실망을 넘어 분노까지 느끼게 했습니다.

'E.T' 게임 화면
'E.T' 게임 화면

분노한 이용자들은 아타리에 몰려가 환불을 요구했고 게임에 대한 악평을 쏟아냈습니다. 'E.T'의 흥행 참패로 아타리는 1983년 5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습니다. 모회사인 워너 커뮤니케이션 역시 아타리의 손실 발표 이후 단 하루 만에 주가가 35% 추락할 정도였죠.

이 사건으로 인해 아타리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는 바닥에 떨어졌고 이러한 불신은 게임 업계 전반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만들게 됐습니다. 이렇게 'E.T'는 영화 엽계에서는 한 획을 그은 대작이지만 게임 업계에서는 실패와 졸속 개발의 대명사가 돼 버렸죠.

그런데 아타리의 큰 사업 실패 정도로 여겼던 이 사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최악의 대처가 불러온 최악의 참사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초조해진 아타리는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수준낮은 게임을 대량으로 찍어냈습니다. '하나만 걸려라'라는 식의 연사는 허공을 가를 뿐이었습니다.

바로 턱 밑까지 추격해온 경쟁사들도 이런 조바심을 자극했죠.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이미 아타리에 여러 번 실망했던 이용자들은 누구도 비디오게임을 사지 않았습니다.

매립장 관리소가 공개한 아타리 게임이 묻힌 곳이 표시된 지도
매립장 관리소가 공개한 아타리 게임이 묻힌 곳이 표시된 지도

수백 만 개의 게임팩이 팔리지 않고 창고에서 썩어갔죠. 이제 업체들은 재고 처리를 위해 덤핑 경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럴수록 외면은 커져갔고 결국 넘쳐나는 재고를 감당하지 못해 뉴멕시코 사막의 쓰레기 매립지에 수백만 장의 게임팩을 파묻어버리게 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가장 핫하던 산업은 이렇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게 됐습니다.

재앙은 아타리 하나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타리를 비롯한 마텔 일렉트로닉스, 액티비전, 볼리 등 경쟁사들도 직원의 1/3을 정리 해고했고 작은 하청업체나 개발사들의 줄도산이 매일 같이 이어졌습니다.

1982년 30억 달러를 육박했던 비디오게임 시장은 불과 1년 만에 1억 달러 규모로 축소됐습니다. 이 시장에 뛰어드는 일은 정신 나간 짓으로 치부됐습니다. 아타리는 결국 1984년 각 부서별로 나뉘어 매각되며 초라한 말로를 맞이했습니다.

이렇듯 호된 몸살을 겪은 북미 가정용 게임 시장은 2016년 현재까지도 황금기인 1983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최근 매립된 아타리 게임들을 발굴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최근 매립된 아타리 게임들을 발굴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뒤를 보며 앞을 생각해야 할 때

아타리 쇼크는 수익만 쫓은 개발사들의 도덕적 해이를 중심으로 전문성을 잃어버린 경영진의 그릇된 방향성, 저질 게임의 난립, 윤리의식의 부족, 자정 의식의 부재 등의 여러 요소들이 원인으로 벌어진 사건입니다.

아타리 쇼크는 게임회사가 게임의 재미가 아닌 이익만을 추구하다보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게임성보다 수익 모델과 마케팅이 중요해질 때 그 게임의 운명이 치달을 곳은 하나뿐이지요.

이처럼 게임 산업에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 아타리 쇼크. 30년이 지난 오늘도 언제든 제 2의 아타리 쇼크가 일어날 수 있음을 생각하며 과거의 일들을 반면교사 삼아 다시는 이런 참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해야할 것입니다.


심정선 기자 (narim@dailyga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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