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케니아 혈족 제사장 회의에서 결론이 도출되자 협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하루에도 수백 명씩 아케니아 혈족들은 수송용 마차에 타고 새로운 이주지로 이동했다. 그렇게 험준한 얼음산에서 거주하던 아케니아 혈족들의 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었다. 아케니아 혈족들이 오랫동안 광석을 채굴하던 광산은 텅 비어버렸고 마을은 도무지 인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다행히 발렌시아드 연맹에서 제공한 땅은 거주하기에 최상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혹한의 얼음산과는 달리 연중 기후가 따듯했으며 근처에 커다란 강이 흘러서 식수를 구하기에도 용이했다.
새로운 땅에 만족한 아케니아 혈족은 거주지 근처에 견고한 성을 지었고, 동시에 부근의 개발되지 않은 광산에서 채굴작업을 시작했다. 얼음 거인의 노예로 살아온 세월을 뒤로 하고 발렌시아드 연맹의 새로운 일원이 되어 그들이 내어준 거주지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살아가게 된 것이다.
발렌시아드 연맹과 협정을 맺은 지 6개월도 되지 않아 이주 작업이 거의 다 마무리되었다. 그 사이 얼음산맥의 모든 아케니아 혈족은 새로운 거주지로 옮겨갔다. 이주자들의 관리를 위해 남아 있던 몇몇 제사장과 아케니아 혈족들도 속속 작업을 마치고 발렌시아드 연맹에서 제공한 마차에 몸을 실었다.
가장 끝까지 남아 있던 자들 중 제사장인 파야곤은 회한이 깃든 눈빛으로 텅 빈 광산 입구를 쳐다보았다.

거무튀튀한 광산은 그의 혈족이 수백 년 동안 광물을 캐내던 일터였다. 많은 일족들이 오랜 세월 이곳에서 삶을 영위하며 살아가다 생을 마치고 땅에 묻혔다. 그런 곳을 버려두고 떠나려니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찡해오는 파야곤이었다.
그의 혈족도 오로지 파야곤만 남겨두고 모두 새로운 거주지로 이주한 상태였다. 계획대로라면 파야곤도 벌써 오래전에 혈족이 있는 곳으로 떠났어야 했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기에 파야곤은 수송용 마차에 타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것은 파야곤의 마음 한구석에 간직된 하나의 비밀 때문이었다.
파야곤은 이미 인생의 황혼기를 오래 전에 흘려보낸 노인이다. 피부가 온통 비늘로 덮인 탓에 다른 종족들은 쉽사리 아만족의 나이를 집작하지 못한다. 아마 이종족의 눈에는 노인이나 젊은이나 모두 동일하게 보일 터였다.
얼음 거인에게서의 해방도, 새로운 땅으로의 이주도 늙은 파야곤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 된 지 오래였다. 그가 홀로 남은 것은 아쉬움이나 미련 따위 때문이 아니었다. 정작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던 것이다.
아주 오래전, 파야곤이 아직 어린아이이던 시절 그는 할아버지로부터 비밀 하나를 들었다. 그것은 일족 중에서도 오직 파야곤의 할아버지만이 알고 있던 비밀이었다. 그리고 그 비밀이 지금에야 족쇄처럼 그를 옭죄고 있었다. 평생을 가슴에 묻어두려 했던 일이 이 땅을 떠나는 그의 발목을 붙잡은 채 놓아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혈족, 아니 비단 그의 혈족만이 아니라 아만족 전체의 운명을 뒤흔들 수도 있는 ‘전사’에 대한 비밀이었다. 평생 처음으로 그 비밀에 다가가려는 파야곤의 가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요동을 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