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고는 파야곤을 억지로 쫓아 보낸 후 제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수백 년 동안 얼음에 갇혀 있던 탓에 머릿속이 무척 혼란했다.
카르고는 조용히 봉인되기 전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아케니아 혈족은 아만족의 한 갈래이다. 대륙 전체에 퍼져 사는 아만족은 뛰어난 신체적 조건을 지니고 있다. 그 신체능력을 탐낸 얼음 거인들은 아만족을 대대적으로 붙잡아 노예로 삼았다. 병사, 일꾼 등등 아만족의 쓰임새는 무궁무진했다.
아케니아 혈족은 다른 아만족과 달리 외진 곳에 동떨어져 따로 생활을 영위하던 부족이었다. 험준한 얼음 산맥을 근거지로 살아가던 아케니아 혈족은 다른 아만족들이 얼음 거인들이 세운 신성제국의 노예로 힘겹게 살아가던 때에도 정복되지 않고 고유의 생활방식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얼음 산맥에 숨어 살던 아케니아 혈족이 대륙을 지배하던 얼음 거인의 눈에 띈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공교롭게도 아케니아 혈족에 대한 정벌에 나선 자들은 얼음 거인들 중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무자비하기로 소문난 세피로스 혈족이었다. 그들은 막대한 병력을 투입하여 아케니아 혈족을 정벌했다. 그리고 철저히 피와 죽음에 의한 철권통치로 아케니아 혈족을 다스렸다.
다른 얼음 거인들은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제시하며 아만족을 병사로 혹은 일꾼으로 만들었지만 세피로스 혈족은 그렇지 않았다. 세피로스 일족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일꾼으로 부릴 노예뿐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아케니아 혈족의 전투계층을 말살시키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 결론을 내렸다.

카르고는 본래 아케니아 혈족의 제사장을 수호하는 친위대에 소속되어 있던 전사였다. 압도적인 얼음 거인의 힘 앞에서도 일체 전의를 꺾지 않은 순수한 혈통의 전사. 가장 강한 힘과 강인한 마음을 지닌 전사. 그들이 최후의 순간에도 무기를 놓지 않았기 때문에 잔인하고 집요하기로 소문난 세피로스 혈족의 얼음 거인들도 결국 그들을 직접 처리하지 못하고 얼음에 봉인하는 방법을 선택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수백 년의 세월을 갇혀 있다가 다시금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카르고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했다.
“다른 혈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오랫동안 갇혀 있던 카르고가 그것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어쨌거나 다른 아만족들은 아직까지 전사의 혈통을 이어나가고 있을 터였다. 오직 카르고 하나만 남은 아케니아 혈족과는 달리 말이다.
카르고가 별안간 눈빛을 빛내며 몸을 일으켰다.
“지금 시급한 것은 몸을 만드는 일이다. 전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싸울 수 있는 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지”
카르고가 허리를 굽혀 파야곤이 남겨 둔 배낭을 집어 들었다. 살짝 들여다본 결과 몇 달은 버틸 수 있는 식량이 들어 있었다.
“물은 얼음을 녹이면 해결될 테고, 아무도 없다니 수련에는 최상의 조건이겠군”
눈빛을 빛낸 카르고가 광산의 바깥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이전에 그는 전사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전사일 것이다. 그러니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전처럼 강한 몸을 만드는 것이었다.
광산의 어두컴컴한 통로에 두 개의 붉은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묵직한 발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아만의 이케니아 혈족의 마지막 전사 카르고가 다시금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가고 있었다. 이미 가루가 되어 바스라진 다른 전사들의 영혼이 그런 그를 배웅하는 듯 희미한 빛이 카르고의 뒤에서 깜빡이다가 이내 어둠에 묻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