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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역사위원회] 4화

행성역사위원회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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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게임] 4화
행복한 남자(1)

“세자 저하, 이제 그만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강빈이 세자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세자는 심호흡을 하며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화가 난 건 아니었다. 답답하고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렇게 답답한 것은 방금 전까지 아우인 봉림 대군과 한바탕 설전을 벌인 까닭이었다.
지난 8년 동안 청국의 심장부에서 이 나라의 성장을 지켜봐 놓고도 고작 생각하는 게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게 안타까웠다.
세자는 여진족 오랑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청에 볼모로 잡혀와 지내는 동안 청의 국력과 성장을 보며 자기의 생각을 싹 고쳐먹었다.
게다가 현재에 이르러서는 명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북경까지 점령하지 않았느냐 말이다.
나라에 진정 필요한 것은 힘이었다.
국력. 아무리 명분이 훌륭한 나라라고 해도 힘이 없으면 주변 나라에게 점령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약한 나라의 운명이요, 명의 운명인 것이다.
그러나 그 힘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콕 집을 수는 없었다.
“빈궁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세자가 강빈을 쳐다보며 물었다. 강빈의 눈과 세자의 눈이 마주쳤다. 세자의 표정은 점점 평온을 찾아가고 있었다. 강빈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소첩은 언제나 세자 저하의 생각이 옳다고 믿고 있사옵니다. 뜻을 꺾지 마시옵소서.”
세자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강빈을 쳐다봤다.
지난 8년간 심양관의 안주인으로서 고국에 있을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허드렛일까지 하면서 자기 곁을 지켜 준 여인이었다.
세자는 새삼 강빈에 대한 고마움이 샘솟아 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세자는 강빈의 손을 찾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고맙소. 그 말밖에 내가 무슨 말을 더하겠소?”
“황공하옵니다.”
볼모 생활의 어려움은 두 사람의 사이를 더욱 돈독하게 해 주었고 세상을 보는 눈과 앞으로의 각오를 서로 공유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두 사람은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서로의 온기가 서로의 가슴까지 따뜻하게 전달되었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세자가 강빈의 손을 잡은 채 물었다.
“밖에 누구냐?”
“세자 저하, 예친왕께서 전갈을 보내셨사옵니다.”
“그래? 이리 가지고 오너라.”
세자는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반갑게 서찰을 받아 들었다.
예친왕 도르곤은 청 황제의 삼촌으로 실질적으로 청의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세자와 동갑인 데다 서로 생각하는 게 비슷해 비록 볼모의 몸이긴 했지만 그간 친구처럼 지내 온 터였다.
이자성의 농민 봉기로 명의 황제가 자진하여 무주공산이 된 북경에 도르곤은 청의 총사령관으로 들어왔다. 이후 도르곤은 빠르게 민심을 안정시키고 질서를 회복해 나갔다.
그 즈음에 도르곤은 세자에게 북경으로 올 것을 요청하였고 세자는 청의 힘과 명의 멸망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었다.
그렇게 북경에 도착한 것이 바로 전날이었다. 그리고 오늘 함께 온 아우 봉림 대군과 명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 언성을 높이고 말았던 것이다.
서찰에는 심양에서부터 잘 왔느냐, 어려움은 없었느냐는 등 안부를 물은 후에 지금 만나자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서찰과 함께 가마를 보낼 터이니 그걸 타고 오시게. 나도 오랜만에 오늘은 일찍 일을 마치고 멀리서 온 친구와 함께 술 한잔하며 회포를 풀고 싶다네.’
세자의 얼굴에 빙그레 웃음꽃이 피었다.

***

가슴이 답답할 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는 것 이상 좋은 처방이 어디 있으랴.
세자는 북경에 도착한 지 하루 만에 자기를 불러 주는 도르곤이 고마웠다.
명의 잔재를 씻어 내고 새로운 체계를 잡아 가려면 촌각의 시간도 허투루 쓸 수 없을 정도로 바쁠 터인데 자기를 위해 이렇게 시간을 내어준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를 깊이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또 세자가 도르곤을 빨리 만나고 싶었던 것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다.
명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서, 이미 져 버린 명과 이제 막 찬란하게 떠오르는 청에 대해서, 청의 실권자인 도르곤이 설계하는 청의 미래에 대해서…….
결국 그것은 청의 힘, 그 힘의 실체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세자가 항상 생각해 왔던 나라의 힘,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조선에도 적용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사실은 그게 제일 중요했다. 도르곤이 오늘 그 이야기를 꺼낼지 알 수는 없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가마가 멈추어 섰다. 세자의 생각도 같이 멈추었다.
안내된 방으로 세자가 들어서니 도르곤이 반갑게 웃으며 세자를 맞이했다.
방에는 이미 주안상이 마련되어 있었고 잘 익은 술과 기름진 안주들의 향기로운 냄새가 방 안에 가득했다.
“국사에 바쁘실 텐데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먼 길에 아직 여독이 안 풀리셨을 텐데 이렇게 오시라 해서 어떨지 모르겠소.”
의례적인 인사와 함께 술이 몇 순배 돌자 분위기가 풀어지면서 두 사람의 자세와 말투도 풀어졌다.
도르곤은 명의 장군 오삼계와 함께 북경으로 짓쳐들어오던 때의 일들을 신나게 떠벌렸다.
가만 듣다 보니 그건 절대 도르곤이나 청이 뛰어나서 이룩한 게 아니었다. 명의 운명이 다하는 순간, 운 좋게도 청이 그걸 덥석 받아먹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아, 그때 그 순간에 그 자리에 청이 아니라 조선이 있었다면……. 조선이 이 중원을 차지할 수도 있었지 않겠나…….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벌렁거려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세자는 연거푸 몇 잔의 술을 들이켰다.
하지만, 뜨거운 술기운이 식도를 타고 흘러들면서 세자의 꿈은 즉시 깨고 말았다.
하지만, 조선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받아먹기는커녕 명을 구해야 한다며 부산을 떨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놈의 존명……. 도대체 명이 무엇이관데…….
세자는 쓴 입맛을 다셨다.
세자는 도르곤의 이야기를 계속 들으면서 자기가 크게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청은 명을 접수할 준비가 이미 되어 있었고,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나라였다. 조선이었다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란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세자는 조선의 현실을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자기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니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

“이보게, 소현.”
도르곤이 은근한 목소리로 세자를 불렀다.
“왜 그러나, 도르곤?”
세자도 따라서 은근한 목소리로 답했다.
도르곤이 술을 한 모금 홀짝 마신 후 말을 이었다.
“우리 대청의 기틀을 잡으신 고황제께서 우리 씨족의 성씨를 아이신줘러[愛新覺羅]라고 하신 이유를 알고 있나?”
“……?”
“자네도 알다시피 아이신은 우리 동족 말로 금(金)이라는 뜻이라네. 줘러는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란 뜻이고……. 즉 금씨 성을 가진 씨족이란 말이지.”
“그래, 그래서 고황제께서 처음 나라를 세우시고 이름을 금이라 정하지 않으셨나?”
“그렇지, 우리가 그 옛날 금국을 계승한다는 의미셨지.”
도르곤이 다시 술을 한 모금 들이켜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조선에도 금씨 성이 있지 않나?”
“있지……. 우리말로는 김이라고 읽긴 하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고황제, 아니 할아버지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말이 있다네.”
세자가 호기심이 발동해서 물었다.
“그게 뭔가?”
“우리와 조선은 한 형제이니 형제의 예로 지내라는 말이었다네.”
세자는 발끈해서 다시 물었다.
“아니, 그럼 형제의 예를 갖추는 것이 조선을 침략하고 우리를 볼모로 잡아와서 핍박하는 것인가?”
“그건 자네도 알다시피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않은가? 조선이 우리를 벌레 보듯 하고 명만 떠받들어 모시니 아무리 형제의 나라라고 해도 참을 도리가 없질 않은가?”
두 사람 사이에 긴장이 흘렀다. 두 사람은 말없이 자기 술잔을 채워 연거푸 몇 잔씩을 마셨다.
침묵을 깬 것은 도르곤이었다.
“이보게, 소현.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으이. 그건 내 형과 자네 아버지 사이의 일이 아닌가. 이제 중요한 것은 나와 자네 사이의 관계가 아닌가?”
세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 말이 맞네. 과거는 이미 흘러가 버린 강물, 이제 앞으로 자네와 내가 조선과 청의 관계를 주도해 나갈 날이 오겠지.”
세자는 다시 한 잔의 술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가슴속에 있던 질문을 끄집어냈다.
“그래서 말인데……. 이제 우리를 돌려보내 주어야 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도르곤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한참을 세자를 쳐다봤다. 눈빛에 열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도르곤도 술을 한 잔 마신 후 엉뚱한 질문을 했다.
“자네는 우리 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조금 뜬금없는 질문이긴 했지만 그건 최근에 세자가 많이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세자는 그동안 자기가 보고 느낀 바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청은 중원을 다스리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는 나라라 생각하네. 나는 조선 또한 이렇게 강한 나라로 키우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네.”
말을 마친 세자는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친구와 함께 흉금을 털어놓는 자리라면 대취해도 상관없겠으나 마실수록 정신은 더 말똥해지고 가슴은 더 쓰라리기만 했다.
도르곤이 그런 세자를 말없이 쳐다보다가 잔을 들어 건배를 제의했다. 둘은 잔을 높이 들어 술잔을 비웠다.
도르곤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는 우리 청을 역사상 유래가 없는 최강국으로 키우고 싶다네. 하지만 내게는 시간이 많지 않다네.”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우린 이제 겨우 서른을 갓 넘겼을 뿐이야.”
“아니 아니야. 황제가 더 크면 틀림없이 나를 제거하려고 할 것이야. 그리고 지금도 나를 쫓아내려는 세력이 내가 실수할 틈만 노리고 있다네.”
“그래서, 어쩔 생각인가?”
“내가 여기서 마음껏 내 생각을 펼칠 수 있으려면 든든한 배후 세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래, 그래야겠지.”
“그래서……. 자네가 내 형제로서 내 배후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네.”
세자는 가볍게 실소를 머금었다.
“내가 무슨 힘이 있어 자네의 배후 세력이 될 수 있겠나?”
“자네가 조선의 왕이 되면 힘이 생기지 않겠나?”
“내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기다리려면 자네 모자란 시간이 더 모자랄 수도 있을 텐데…….”
세자는 말을 하다 말고 뭔가가 뒤통수를 강하게 때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세자는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도르곤을 쳐다봤다.
“자네, 혹시……?”
“그래, 바로 그거네. 자네도 하루 빨리 조선의 왕이 되어 자네 생각대로 새로운 조선을 만들고 싶지 않은가? 내가 그렇게 해 주겠네.”
세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 도르곤의 말은 청의 힘으로 조선의 왕을 실각시키겠다는 뜻이 아닌가.
세자는 화를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네, 그게 형제에게 할 소리인가? 내 오늘은 자네가 취해서 실수한 거라 생각할 테니 앞으로는 절대 그런 말 입에 담지 말게나! 날더러 어찌……. 그건 충도 아니고 효도 아니라네!”
도르곤은 세자의 말을 듣고 있는지 어떤지 아무런 반응도 없이 천천히 술잔을 들어 술을 마셨다. 시중을 들던 사람들이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서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세자는 인사고 뭐고도 없이 냉정하게 돌아서서 밖으로 나왔다.
가마꾼이 서둘러 세자 앞에 가마를 대령했지만 세자는 거들떠도 안 보고 휘적휘적 가마를 지나쳐 걸어갔다.
밤바람이 세자의 뜨거워진 머리를 천천히 식혀 주었다.

나비의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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