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시티2000'.](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0032415043304465da2c546b3a1235116101.jpg&nmt=26)
"끝이 없는 게임이 어디 있어!" 개발자 윌 라이트는 연이은 거절에 의기소침해졌습니다. 그의 신작 '마이크로 폴리스'는 그야말로 괴상했죠. 출생률, 인구, 부동산, 공해, 범죄 등 요소를 넣어 도시계획 시뮬레이션하는 게임을 만들겠다는 이 괴짜 개발자에게 선뜻 투자를 결정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스토리도, 엔딩도 없는 게임이 어디 있냐는 핀잔만 돌아왔습니다.
윌 라이트는 어느 날 개발자 파티에서 귀인 제프 브라운을 만납니다. 제프 브라운은 '마이크로 폴리스'의 창조성에 감탄했고 두 남자는 개발 끝에 1989년 게임을 출시, 3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게 됩니다. 이 게임이 바로 '샌드박스(모래상자)' 장르의 조상으로 불리는 '심시티'입니다.
윌 라이트의 유년 시절이 '심시티' 개발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가 다닌 몬테소리 학교는 주변의 사물을 이용해 원리를 스스로 깨치는 장난감 교육으로 유명합니다. 부수고 조립 하는 경험이 개발 철학의 싹을 틔운 거죠.
!['퐁'.](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0032415045808448da2c546b3a1235116101.jpg&nmt=26)
!['팩맨'.](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0032415051908066da2c546b3a1235116101.jpg&nmt=26)
'심시티'의 성공은 게임의 정의 자체를 바꿔 놓았습니다. 엔딩과 스토리가 없어도 게임이라는 걸 그가 증명해낸 셈이죠. '심시티'의 기록적인 판매고는 이후 시뮬레이션 장르 게임 개발을 촉발합니다. '문명', '타이쿤' 시리즈, '블랙앤화이트' 등 전설적인 게임들이 줄줄이 출현합니다.
◆장난감이 된 게임, 하는 게임에서 만드는 게임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비디오게임 '마인크래프트'. 별명은 '디지털 레고'다. '마인크래프트' 출시 이후로 레고의 장난감 판매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0032415055107261da2c546b3a1235116101.jpg&nmt=26)
지난 2011년 발매된 '마인크래프트'는 윌 라이트의 철학이 극대화된 게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해진 목표도 엔딩도 없지만 현재까지 약 1억8000만 장이 팔려 역대 가장 많이 팔린 비디오게임의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재료를 파고 건물을 짓고 전투를 하고, 모든 건 이용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서사에 개발자의 입김은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용자의 상상력이 곧 이야기가 되죠. 무규칙이 규칙인 셈입니다.
각종 모드(Modification)의 출현도 같은 맥락에서 읽힙니다. 이용자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게임을 재창조하며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습니다.
![AOS 계보. 스타 유즈맵 'AOS'에서 수많은 게임들이 파생됐다(출처=AOS 나무위키 캡처).](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0032415064602354da2c546b3a1235116101.jpg&nmt=26)
◆포스트모더니즘의 바람, 저자도 개발자도 죽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남긴 전쟁의 상흔은 포스트모더니즘을 탄생시킨다.](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0032415075500229da2c546b3a1235116101.jpg&nmt=26)
1960년대 시작된 포스트모더니즘은 제 2차 세계대전에 강한 영향을 받아 전후(戰後) 사조라고도 불립니다. 너무나 비인간적인 참극을 목격하며 당대의 지식인들은 그간의 사고를 지배했던 합리성과 이성, 객관주의에 대한 의문을 품습니다.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모조리 붕괴하고 말았습니다. 전후의 세계를 표현하기엔 그들의 예술은 너무나 빈약하고 초라했죠.
![롤랑 바르트.](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0032415082304239da2c546b3a1235116101.jpg&nmt=26)
똑같은 글이라도 읽는 사람, 시대,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콘텐츠와 의미가 1대1이 아닌 1대 무한대가 되는 세상이 시작된 거죠. 작가는 글을 작성할 뿐 의미 부여는 전적으로 독자에게 달려있습니다.
샌드박스 장르는 지극히 포스트모더니즘적입니다. '롤러코스터 타이쿤'은 놀이동산을 경영하는 게임이지만 상당수 이용자는 방문객을 가두고 굶겨 고문하며 즐거움을 느낍니다. 집에 화장실을 만들지 않고 무슨 일이 일어나나 관찰하거나 불을 지르고 뛰쳐나오는 심(심즈 주민)들을 관찰하라고 적은 설명서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개발자도 그런 의도로 게임을 만들지는 않았죠.
게임은 더 이상 개발자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각종 퀘스트와 강제 이벤트로 점철된 게임은 획일적이고 지루하다는 평을 듣기 십상입니다. 개발자가 서사를 강요하는 게임이 이용자들은 염증을 느낍니다. NPC, 오브젝트(사물), 그리고 다른 이용자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풍부한 서사를 직접 만들어낸 게임이 호평 받는 세상입니다.
◆게임은 진화한다, 이상하게
![영화 '어벤저스'에서 병약했던 청년 스티브 로저스는 실험을 통해 슈퍼 솔저로 거듭난다. 그가 남들보다 뛰어났던 건 순수한 마음과 끈기였다(사진 제공=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0032415102403482da2c546b3a1235116101.jpg&nmt=26)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게임은 이상한 사람들에 의해, 이상한 방식으로 진화해 왔습니다.
윌 라이트는 자신을 천재가 아니라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아이디어가 뛰어난 사람은 많지만 고난을 견디고 세상에 자신을 관철시킬 수 있는 뚝심이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만약 윌 라이트가 세상의 편견을 이기지 못했다면 게임의 모습은 지금 우리가 아는 형태와는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어쩌면 '리그오브레전드' 대신 '리그오브수집형RPG'가 PC방 1위를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리=이원희 기자(cleanrap@dailygam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