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신진섭 게임칼럼니스트]
![넷플릭스 '스트라이킹 바이퍼스'의 한 장면.](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0042118055504586da2c546b3a1235116101.jpg&nmt=26)
넷플릭스의 시리즈물 '블랙미러5'의 '스트라이킹 바이퍼스' 에피소드 내용입니다. 여기서 질문. 두 친구는 동성애자일까요? 또 두 남자의 애정행각은 외도로 볼 수 있을까요? 게임 속에서 일어난 일일 뿐, 현실과는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친구와 사랑을 나눴다는 기억과, 유사한 경험을 반복하고 싶다는 욕망은 엄연히 현실세계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가상현실에 불과했던 게임과 현실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지점입니다.
◆현실을 전복한 '레디 플레이어 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레디 플레이어 원'.](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0042118062806297da2c546b3a1235116101.jpg&nmt=26)
!['검은사막' 커스터마이징.](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0042118070307857da2c546b3a1235116101.jpg&nmt=26)
!['리니지' 성주.](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0042118073701712da2c546b3a1235116101.jpg&nmt=26)
◆게임이 아니라고 증명할 수 있습니까
![기계어. 게임은 0과 1이 반복되는 기계어에 그래픽을 입힌 가짜다.](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0042118081905428da2c546b3a1235116101.jpg&nmt=26)
한 발짝 더 나아가 볼까요? 지금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게임이 아니라는 증거는 어디있습니까. AC 2500년, 과학기술이 극도로 발달해서 현실의 모든 감각을 재현할 수 있는 MMORPG(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 '라이프 온라인'이 탄생한 겁니다. 실제 당신은 안드로메다 성운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 외계인이죠. 지구라는 것도 원래는 없는 게임 속 가상의 행성입니다.
![영화 '매트릭스'의 악당 스미스 요원.](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0042118090907718da2c546b3a1235116101.jpg&nmt=26)
게임이라기엔 너무 진짜(현실) 같다는 말은 순환논리에 불과합니다. 어제 당신이 먹었던 족발은 원래 그런 맛이 맞습니까? 족발은 3D 그래픽으로 탄생한 0과 1로 구성된 데이터에 불과하다면 어떨까요. 당신이 느끼는 감각은 그저 컴퓨터 논리 연산으로 탄생한 일종의 '이펙트'에 불과한 거죠. 당신은 게임이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감각합니다.
아니, 당신은 그저 NPC에 불과합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한다는 '자유의지'도 착각에 불과합니다. 그저 그렇게 프로그래밍돼 있을 뿐이죠. 당신의 운명이란 건 이미 게임 개발자에 의해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이 이렇게 하드코어한 거죠. 이름도 기억하기 어려운 수많은 게임 속 NPC처럼 당신은 주인공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통 속의 뇌', 컴퓨터에게 만든 세상
!['버터플'.](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0042118094709269da2c546b3a1235116101.jpg&nmt=26)
어느 날 꿈속에서 장자는 나비가 되어 꽃발을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꿈을 깨어보니 자신은 장자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순간 장자는 혼란에 빠집니다. '장자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장자가 꾼 이 꿈을 장주지몽(莊周之夢) 또는 호접지몽(胡蝶之夢)이라고 부릅니다. 게임으로 비유하면 '장자 온라인'인지 '나비 온라인'인지 판단하기 불가능하다는 거죠.
!['매직더게더링' 카드 '병 속에 담긴 뇌'.](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0042118114000250da2c546b3a1235116101.jpg&nmt=26)
통 속의 뇌 실험은 데카르트적 사고를 기초로 합니다. 믿을 수 없는 건 모두 배제하면 진정 믿을 수 있는 것을 발견한다는 회의주의가 그것이죠. 데카르트에 따르면 사물, 관념, 이상, 가치, 인간 모두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낼 수 없습니다. 회의주의적 사고를 극단으로 밀어붙인 데카르트의 결론이 바로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코기토 에르고 줌)'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거짓이어도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다'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라는 겁니다.
!['통 속의 뇌' 디씨 버전.](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0042118121507042da2c546b3a1235116101.jpg&nmt=26)
커다란 빌딩 안에 있는 어느 회사에서 사원번호 427번으로 일하는 당신은 단순 반복 사무직이지만 어느 순간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오지 않아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그가 사무실 문을 나서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되는데...
지난 2013년에 출시된 인디게임 '더 스탠리 패러블'의 오프닝 부분입니다. 이 게임은 현실과 가상세계의 벽을 의도적으로 붕괴시키는 것이 특징입니다. 영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나레이터는 당신(스탠리)이 지시대로 움직여서 해피엔딩에 도달할 것을 권유합니다. 보통의 게임이라면 여기서 끝이 나겠죠. 하지만 이 게임은 영원히 끝이 나지 않습니다. 엔딩을 보고 또 봐도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사원번호 427번 스탠리는 다시 깨어나게 되죠.
의아함을 느낀 플레이어는 기존에 가지 않았던 길,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하게 되고 나레이터는 플레이어의 행동을 제지하려 합니다. 아직 개발이 완료되지 않은 방에 들어가려는 플레이어를 꾸짖고, 제발 그 버튼은 누르지 말아달라며 간청을 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게임 코드를 손보거나 치트키를 사용하는 플레이어는 '반칙'이라며 게임을 종료시키기도 하죠.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대표작 '이미지의 배반(La trahison des images)'. 파이프가 그려져 있지만 그 아래에는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다.](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0042118140708467da2c546b3a1235116101.jpg&nmt=26)
놀랍게도 '더 스탠리 패러블'은 평단과 게임 이용자 모두에게 호평을 받았습니다. 게임 같지 않은 게임에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게임'이라는 찬사라니.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게임이 없다면 현실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키아누 리브스)는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빨간약을 선택한다. 모든 것이 지난 뒤 관객은 네오가 선택한 진실도 결국 허구의 일부분이라는 걸 알게 된다.](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0042118152407887da2c546b3a1235116101.jpg&nmt=26)
'더 스탠리 패러블'의 성공은 '게임의 본질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라는 화두를 남겼습니다. '게임이 무엇이다'는 정의가 사라진다면 게임은 현실과 다르다는 주장도 의미가 퇴색합니다. 애초에 게임이 뭔지 모르는데 어떻게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데카르트 이후에 철학은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는 '실존주의'와 의식을 하나의 현상으로 파악한 '현상학' 등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이에 비춰보면 게임이란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없으며 그저 게임이 존재하며 내가 게임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증명해낼 수 있을 뿐입니다.
과학기술이 발전해 현실 같은 세계를 재창조해 낼 수 있을 때, 과연 게임세계로 넘어가지고 않고 현실에 남아 있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인류 대다수가 조그마한 인큐베이터에 누워 평생을 가상세계에서 보내는 세상이 찾아올지도 모르죠. 그때쯤이면 철학자들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바꿔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게임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말이죠.
정리=이원희 기자(cleanrap@dailygam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