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CR에서 개발한 ‘포트리스2 블루’(이하 포트리스2)는 1999년 서비스 시작과 함께 세대를 초월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간단한 조작으로 다양한 탱크들이 포격하며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최초 회원 1000만 돌파와 함께 ‘국민 게임’의 명성을 얻었다.
포트리스2의 인기는 당시 혁명과도 같았다. ‘바람의 나라’, ‘리니지’ 성공 이후 온라인 게임 산업은 대부분 MMORPG로 사업 방향이 정해진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 포트리스2를 제외한 게임은 ‘일랜시아’, ‘영웅문’, ‘천년’, ‘레드문’ 등 MMORPG에 한정돼 있었다.
포트리스2의 성공은 온라인 게임 산업에 장르의 다양화 바람을 몰고 왔으며 더 나아가서는 원소스 멀티유즈(One Souce, Multi Use)라는 사업 방식을 전파시키며 ‘돈이 되는 미래가치 산업’임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 중독게임의 원조
포트리스의 역사는 199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CCR은 대학생들이 동아리 모임에서 출발해 세운 벤처 기업이었다. 여러 대기업들의 SI 업무를 대행하다 1997년 SK텔레콤의 시스템을 구축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넷츠고(SK텔레콤이 제작한 인터넷 포털 서비스)에 포트리스를 서비스했고 이 게임은 3000명이 넘는 동호회까지 만들어지며 인기를 끌었다. 넷츠고 회원을 가입해야 하는 번거로움에도 불구하고 중독성이 짙은 게임으로 정평 나기 시작했다. 최근에 중독성이 강한 플래시 게임들이 있지만 넷츠고 포트리스의 아성을 뛰어 넘지는 못했다.
포트리스2는 처음 나왔을 때 이 포트리스의 리뉴얼 버전 정도로만 여겨졌다. 넷츠고 회원들을 중심으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그 입소문이 언론의 관심으로 변하면서 포트리스2의 인기도 점차 높아만 갔다.
포트리스2는 ‘스타크래프트’의 초창기 인기가 사그라지며 생긴 PC방의 빈 자리를 충분히 채우고 남았다. 1999년 10월 공식 서비스를 시작하며 바로 PC방을 점령했다. 이때부터 포트리스 열풍이 불었고 12월 대한민국게임대전에서 캐릭터 부문 특별상, 2000년 7월 문화부 선정 ‘이달의 우수게임’, 2000년 대한민국 게임대상 대상 등 각종 상을 휩쓸고 다녔다.
◆ ’국민 게임’ 명성 얻다
포트리스2는 게임사(史)에 있어서 첫 번째로 ‘국민 게임’이라는 타이틀로 불려지게 됐다. 이유는 간단했다. 전 연령층을 아우를 수 있는 쉬운 조작법을 무기로 매달 10만 명 이상의 회원수를 늘리더니 서비스 시작 3년여 만인 2001년 회원수가 1000만을 돌파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반 가정에는 ISBN으로 광통신망이 미처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1000만이라는 숫자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장벽과도 같은 수치였다.
이 사이에 포트리스는 스타크래프트와 함께 국내 e스포츠를 양분하기도 했다. 2000년 2월15일부터 3월27일까지 ‘제1회 하나로통신배 포트리스 게임대회’를 성공리에 개최한 뒤, 2000년 9월 ‘서울 시장배 포트리스2 대회’, 2000년 10월 ‘제1회 WCG 챌린지 포트리스2 시범경기’ 등 다양한 경기로 프로게이머를 배출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했다. 당시 세 곳으로 나뉘어진 서버 중 ‘알파’ 서버는 게이머들이 게임을 하기 위해 대기표를 받고 기다리는 기현상도 자주 연출됐다.
그러나 회원이 늘어만 갈수록 포트리스2를 운영하는 CCR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국민 게임’이라는 명성으로 인기가 높아지는 것은 좋지만 마땅한 수익 모델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늘어나는 회원 수만큼이나 감당할 수 없는 서버비가 문제였고, 업데이트와 패치 등의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 PC방과 갈라서다
CCR은 2001년 1월 드디어 수익 모델을 찾았다. 게임을 즐기는 이용자들이 게임에 직접적인 사용료를 내는 방안에 난색을 표명하고 있으니 게임을 직접 하는 이용자들이 아닌 PC방 업주들에게 돈을 받고 콘텐츠를 제공하기로 한 것.
집에서 게임을 즐기는 대부분의 이용자들은 자신이 직접 요금을 치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환영의 뜻을 내비쳤고 600만이 넘는 이용자의 힘으로 PC방 과금체제가 자리를 잡는 듯 했다.
그러나 PC방 업주들의 거센 반대에 포트리스는 위기를 맞게 된다. PC방 업주들의 단체인 PC방협회에서 CCR을 방문해 직접 항의의 뜻을 전달하기도 했고 가두시위를 펼치기도 했다. 결국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PC방은 CCR에 요금을 내긴 했지만 이후 PC방 업주들이 ‘퀴즈퀴즈’, ‘카트라이더’ 등 다른 캐주얼 게임을 추천하는 등 포트리스2가 내리막 길을 걷는데 부채질을 했다.
또 이때 넷츠고와의 저작권 관련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넷츠고 측에서 프토리스1에 대한 1차 저작물에 관한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으니 포트리스2의 서비스가 부당하다는 것. 법원은 넷츠고의 손을 들어줬고 CCR을 포트리스2의 일부 수익을 넷츠고 측에 내줘야 했다.
◆ 게임산업 화두 ‘원소스, 멀티유즈’
포트리스2가 게임 이용자들의 성향에 맞춰 ‘포트리스2 플러스’, ‘포트리스2 블루’, ‘포트리스3 패왕전’ 등으로 변신을 거듭했지만 PC방의 외면과 다양한 온라인 게임의 등장으로 인해 2002년 이후 서서히 내리막을 걸었다.
그러나 포트리스2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온라인게임 산업에 새로운 화두인 ‘원소스 멀티유즈(One Souce, Multi Use)’를 제시했다. 원소스 멀티유즈란 게임을 게임 서비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 코믹스, 만화영화 등 사업 영역을 확장시켜 다양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을 말한다.
포트리스2는 전성기를 달리던 2001년부터 완구, 문구, 액세서리, 의류 등의 산업으로 진출했다. 초등학생들이 들고 다니는 가방부터 운동화, 필통, 연필, 장난감, 인형까지 포트리스의 캐릭터가 박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코믹스로 나오는 족족 서점가를 점령했고 TV 만화영화로까지 제작됐다.
게다가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높다는 것을 이용해 다양한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2001년부터 코카콜라, 롯데리아, 하나로통신, 오리온 등과 연계해 마케팅을 펼쳤고 항상 기대 이상의 결과를 내놨다. 특히 코카콜라 홈페이지 회원이 포트리스 마케팅 이전 80만에서 포트리스 마케팅 한달 후 160만으로 두 배가 된 것은 업계 전설로 남았다.
포트리스2 이후에 발표된 게임들이 어느 정도 인기의 정점을 찍은 뒤 코믹스와 만화영화, 완구와 문구 등을 제작하는 것 역시 모두 포트리스2의 성공에서 기인한 것이다.

◆ 시대흐름에 뒤쳐진 비운의 국민 게임
포트리스2의 성공가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PC방과 등돌리며 외면을 받은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게임 이용자들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한 탓이 크다.
2002년부터 포트리스2에서는 다양한 모드(MOD : Modification) 게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모드 게임이란 기본 골격은 유지한 채 이용자들이 규칙을 정해 새로운 게임방식을 창조하는 것을 말한다.
가장 기본적인 모드 게임은 게임 서비스 초기부터 나온 ‘빨콩전’과 ‘화력전’. 빨콩전은 포트리스2의 기본 캐릭터 중 하나인 캐논의 포탄 중 하나인 빨간색의 포탄만을 사용한 대전으로 강한 대미지로 한 방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화력전은 말 그대로 화력을 증폭하는 아이템만을 사용해 게임을 즐기는 것이다.
그런데 2002년이 지나면서부터는 올림픽, 토너먼트, FFA(Free For All) 등 다양한 방식이 추가된다. 그만큼 포트리스2 이용자들은 게임이 단순함의 미학에서 탈피해 좀 더 다양한 재미를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포트리스3: 패왕전’과 2005년 ‘뉴 포트리스’가 모습을 내보였지만 기존 게임과 캐릭터만 달라졌을 뿐 게임성에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어 점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그렇지만 포트리스2를 즐겼던 이용자들이 온라인으로 나오면서 다른 게임을 찾았고, 곧 온라인 게임의 춘추전국 시대가 막이 오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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